이제 北을 想起하면서(지명관)

이제 北을 想起하면서

 

 

                                                  2017319    지명관TK生)

 

 어쩐지 한반도의 남북을 통하여 격동의 시대로 돌입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북은 말레시아에서 김정남을 살해했다. 남에서는 처음으로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서 박근혜를 권좌에서 추방했다.

 나는 1973년에 박정희가 그의 정적인 김대중을 도쿄에서 납치했던 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국제적인 압력으로 김대중을 살해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북에서는 오늘도 政敵으로 예상된다면 저렇게 살해하고 그것은 자기들이 한 짓이 아니라고 발뺌을 하려고 한다. 마치 1973년에 박정희 정부가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해 오고는 자기네가 한 짓이 아니라고 갖은 발뺌을 다 했던 것처럼.

 이렇게 회상한다면 한국이 1973년에 하던 짓을 지금 2017년에 북은 아직도 하고 있다고 해도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한국은 이제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서 박정희의 딸을 권좌로 나아가게 했는가 하면 그녀가 그릇된 행동을 하자 같은 민주적인 절차로 전 국민 또는 전 세계가 납득하는 방식으로 그녀를 권좌에서 떠나게 했다.

 여기에 한반도의 남북의 정치는 확연히 다르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남쪽 한국이 1973년에 하던 것과 같은 無法政治를 오늘도 북쪽은 계속하면서 세계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남쪽에서 민주적인 절차로 박근혜를 내몰았다는 것은 어쩌면 박정희로 시작된 군부통치와 그 잔재를 2017년에는 멀끔히 청산하고 민주정치의 성숙기를 향해 걸어가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군사통치의 악유산은 46 년 만에 말끔히 청산되었다고 할까.

 한편 북의 체제는 그런 변화 없이 아직도 정적을 찾아 해외에서 잔인한 행동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면 남쪽 한국에 비하여 적어도 반세기 이상 뒤떨어져 있는 셈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북은 공산주의 이상사회를 꿈꾸면서 시작했다고 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이런 낙후된 체제를 무리하게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셈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독재나 전제는 안 된다. 자유로운 민주체제도 수많은 결점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지만 그래도 인간이 찾아 세울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체제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나도 많은 모색과 방황 끝에 이런 결론에 만족해야 하는 것 같다. 인간이란 그렇게 부족한 존재인데 하고 한숨짓지 않을 수 없다.

 

북을 떠나 남하한 삶

 나는 1945년 해방되던 무렵, 북쪽 定州라는 곳에서 소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다. 바른 정보가 전해지지 않던 일제 지배 하에서 돌연 우리는 해방을 맞이한 셈이었다. 그래서 해방을 속죄하다시피 하면서 맞이하고 해외에서 귀국하는 이승만 김구의 초상화를 교실 벽에다 부치고는 그들을 찬양했다. 그 다음해 봄이었을까. 김일성의 지배  하에 있었던 북조선 인민위원회에서는 일제히 김구나 이승만의 이그러진 만화를 벽에다 부치고 그들을 매도하면서 그 대신 김일성의 사진들, 그를 칭송하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누가 얼마나 위대한지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일본 천황을 찬양하다가 간신이 이승만 김구 찬양으로 바꾸었는데 이제 또 김일성으로 칭송 대상을 바꾸어야 `한다면 어린 학생들에게 무슨 얼굴로 대할는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생들을 볼 낯이 없다고 할 수밖에 없어서 차라리 소학교 교사 자리를 물러나기로 했다. 내가 사직을 결정하고 그 뜻을 학생들에게 전했을 때 온 교실이 울음바다가 됐던 것을 나는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떠나는 나 때문만이 아니라 이렇게 해방됐다고 하면서도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나라 형편에 어린 마음에도 안타까워 모두가 울었다.

 곧 북쪽 땅은 어수선해졌다. 공산당 집권 하에 曺晩植과 같은 애국자는 어디론가 납치당해 가고 말았다. 그래서 공산당 정권이 확립된 셈이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당하는 공포 분위기가 시작됐다. 이런 북쪽 사회를 떠나 내가 38선 이남으로 남하한 것은 1947 3월이었지만 이미 그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당하여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고 하던 때였다,

 아마도 그때 그런 시대에서 북은 姜哲煥 安赫이 『북한 탈출』 이라는 책에서 그려낸 것 같은 처참한 정치수용소로 악화돼기 시작한것이라고 생각된다. 북쪽 체제란 한 사람의 청치범이 있으면 그 옛날처럼 3族이 연루되는 사회였다. 그래서 내가 떠날 무렵에는 이미 아들은 아버지가 일제하 부역자였다고 고발해야만 하는 험악한 사회였다. 당에 대한 충성 우선. 머지않아 김일성에 대한 신적인 숭앙. 이런 모두가 말하자면 사회에 매몰돼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나는 일제하에 중단해야만 했던 기독교 교회에 되돌아갔었으나 다시 그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수밖에 없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줄줄이 체포되어 시베리아 행으로 떠나는 시절이었다. 북쪽에 남아있는 사람들이란 재빨리 이 체제에 순응한 사람들이고 38선 이남으로 인연을 찾아서 나설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일제하에 공산주의 사회를 그리던 사람들도 많은 사람들이 탈락돼 간 참으로 슲은 시대였다. 그러니까 남을 그리면서도 찾아 나설 수 없는 북에 남아있어야 했던 사람들이란 북의 공산치하에서 참으로 한 많은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속에서 친구의 도움으로 38선 이남으로 피신할 수 있었던 나는 정말 다행한 운명의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찾아온 38선 이남이란 내가 북에서 그리던 그런 아름다운 사회는 아니었다. 가난한 땅, 보잘 것 없는 인간이 판을 치는 사회는 남북이 마찬가지였다고 할까. 그러나 남은 보다 자유스럽게 자기 삶을 추구할 수가 있는 땅이었다.

 나는 그 당시 남에서 사는 많은 사람들이 그 어려운 삶에서 북을 동경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남북 어디에서도 주어진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삶을 견딜 수 없어하면서 고뇌하는 한국 사람들. 이것이 해방된 땅에 사는 이 나라 백성들이었다. 이렇게 바라보고 고뇌하면서 나는 인생이란 어디를 찾아가도 이런 苦海일 뿐이라고 체념하면서 종교적인 경지를 동경하려고 하였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쓰면서

 1950년부터 3 년간 한국전쟁이 계속되었다, 북에서 남하한 사람이란 북의 체제를 배반했다고 해서 북의 군대는 살려두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몰려오는 북의 군대를 피해서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남하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군이 이 전쟁에 참여해 줌으로써 한국 동남쪽 귀퉁이가 보전되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살아남았다고는 하여도 가혹한 운명은 가실 길이 없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회란 군부우위의 사회가 될 수밖에 없었다. 1961년부터 남쪽 한국은 군부지배자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시대가 되었다. 그것에 비판적이라고 해서 직장을 추방당하자 나는 얼마 되지 않아 유학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찾아와서 거기서 새로운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

 도쿄에서 살면서 나는 한국 남쪽 땅 군사정권과 대결하려고 했다. 그래서 쓰기 시작한 것이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이었다. 투쟁이란 효과적이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해야만 된다. 그래서 남쪽의 군사정권과 투쟁하면서 북의 처참함은 거론하지 않는다고 마음을 정했다. 북이 이렇게 나쁘다고 하면 남이 이렇게 나쁘다는 공격의 화살이 무디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남의 정치권력이 북을 공격하면서 자기들이 옳다고 내세우려고 한다면 더욱 그럴 것이 아니겠는가. 남의 군부세력은 북이 옳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들은 그들과 싸우기 위해 일사불란해야 한다고 변명하려는 자세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의 군부 권력은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적으로 삼으면서 그것은 북을 이롭게 하려고 하는 친공적인 세력이라고 치부하려고 했다. 통신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대북자세에 있어서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전제정권이란 권력에 대한 견제세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악화되고 더욱 사악하게 되는 법이라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내가 북을 떠날 때 바라보던 공산정치권력이 3代를 이어오면서 계속한다는 생각은 도저히 예상할 수가 없었다. 그때 이렇게 악했으니 지금은 더욱 악하게 되었지 않겠는 가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북에서 이남의 사회를 생각했듯이 남에서 북을 생각하면서 그 곳에서는 이렇지는 않겠지, 보다 양심적인 세력이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애쓰면서 서로 협력하고 있겠지 하고 거기에 참여한다고 북을 찾아간 인사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남에서 침묵을 지켰다.

 내가 젊어서부터 존경해온 작가 李泰俊도 金南天도 그리고 시인 林和도 북을 찾아가서 어디로 어떻게 걸어 갔는 가고 생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는 대선배들이니까 이제는 가고 없겠지만 그들은 정말 북에서 한 많은 인생을 살면서 남쪽 먼 하늘을 동경하다 이 세상을 떠나갔을 것이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도 한반도는 한 많은 땅. 이제 이렇게 나도 인생 마지막을 바라보게 되었으니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운명이라고나 할까. 이 땅 이 백성이 지닌 운명, 더욱이 한 많은 지식인의 인생을 생각하고 한  숨 짓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나는 누구에게도 원한을 품지 않으련다. 그리고 아직도 북녘 땅에서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 정치범 수용소에서 몸부림치면서 허덕이는 동족들을 위해서 눈물짓는다. 그들을 그렇게 내몰고 있는 힘을 가진 인가들이란 어떻게 된 인간들일까. 한반도는 왜 이렇게 남다른 고난을 언제까지 짊어지고 허덕여야 하는 것일까. 이런 세계사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는 것일까. 나는 눈을 감으면 이러한 상념에 허덕일 수밖에 없다.

 

뒤늦은 향수라는 것

 기이한 운명의 땅, 그곳도 북녘 땅에서 태어나 20 여년 후에 나는 남쪽 땅을 밞아 교육도 받고 그리고 나서 일본에 가서 20 여년을 지내고 활동도 했다. 귀국해서 다시 20 여년, 이제는 미국에서 내 인생을 끝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방랑생활이나 하듯이 이곳저곳을 떠다니다가 과오 많은 인생을 마감한다고 할까.

 행불행을 묻지 않고 다만 주어진 인생을 긍정하면서 지금 종언의 땅으로 내가 선택할 수만 있다면 역시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북녘 고향 땅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앞선다. 거기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묻힌 땅이 아직도 그대로 있다면 나도 그 옆에 영원한 땅을 찾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곳은 이국땅보다도 먼 우리가 갈 수 없는 산하가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제야 자유나 얻는 것처럼 그 땅을 생각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歸巢本能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이 지상 어디와도 다르게 남녘에서 살아온 우리들이 찾아갈 수 없는 땅. 이런 생각에 다다르면 나는 남북으로 갈라져 사는 많은 동포들을 생각하고 이렇게 남북으로 갈린 한국의 땅은 사실은 이 백성의 원성으로 가득 찬 땅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남북으로 갈라진 채 숨을 거두어야 했을까. 오늘날 이런 잔인한 땅이 세계 어디에 또 있을까. 이런 땅을 그대로 남겨둔 채 모두가 체념하고 망각하고 살다가 떠나야 하는 땅이 또 어디에 있을까.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정치는 남북 어느 쪽을 보아도 가장 잔인한 정치체제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냉전이라는 잔인한 현대정치가 남겨놓은 비극. 우리는 그 정치에 말려들어 견디다 못해 체념해 내버리고 이제는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드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무슨 권한으로 국토를 남북으로 갈라놓고 그 아픔에 몸부림치는 국민을 억압하면서 자기의 체제만이 정당하다고 큰 소리 치는 것인가. 이런 잔인한 세기의 악유산 속에서 지금도 북에서는 정치범 수용소라는 곳이 있다. 이전에 姜哲煥과같은 어린 아이들까지 가두어 놓고 강제노동하게하는곳. 20세기의 세계정치가 남긴 비극을 아직도 그대로 방치해 두려는 정치권력 그리고 그것을 지원하는 국제정치. 그것은  현대가 얼마나 잔인한 시대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  그것에 무감각하다는 것이 곧 이 현대에 있어서의 세계적인 인간악이 아닐까 생각한다. 국토의 분단과 정치범수용소, 이런 인간악을 우리는 고발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아픔을 참고 견디어 내야만 했던 더할 수 없는 고통. 그것이 이제 21세기에 해결해야 할 최대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아무리 자기네 국가이익을 내건다고 해도 이것을 방치한 자세란 무서운 인간악이 아니겠는가. 내 가족 내 형제는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와는 함께하고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났다면 나도 그들의 옆에 묻힐 수 있어야 한다.

 잔인한 근대란 이러한 인간 본래의 길을 막아왔다. 그리하여 그러한 비극이 주는 아픔마저도 망각하도록 강요해왔던 것이 아닌가. 이제 그런 지난날의 책임을 물으면서 대립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인류 악을 함께 생각하면서 인간다운 시대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정말 잘못 걸어온 근대. 해방 후만 해도 70년이나 되는 세월을 회고하면서 인간 본래의 길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정말 오랫동안 우리는 그 길을 벗어나 있었다. 이제 나는 바이불이 말하는 탕자가 돌아오다를 생각하면서 그 땅에서 주어져야 할 마지막 날을 기원하는 것이다.